이름 | 에디타 슈타인
축일 | 8월 9일.
구분 | 순교자. 수녀
연도 | 1891-1942
다른이름 | 데레사 베네딕타, 테레시아
유대인 출신의 가톨릭 성녀. 순교자. 가르멜 수도회 수녀. 유럽의 수호성인.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학문적 업적은 크게 현상학적 기여와 신학(특히 여성신학) 부분으로 나뉜다.
자신의 뿌리이자 당시 박해로 고통받던 유대인과 수도생활 속에서 깊이 연대하고자 했던 20세기의 성녀. 교회 역사상 유대인으로서는 처음 성인품에 오른 인물로 한나 아렌트, 시몬느 베이유,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세계 4대 유대인 여성 철학자
출생 1891년 10월 12일 독일 브레슬라우.
1942년 8월 9일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선종.
1987년 5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이 시복하였고,
1998년 10월 11일 역시 같은 교황이 시성하였다.
성녀 에디트 슈타인은 1891년 10월 12일, 지금은 폴란드 땅이지만 당시에는 독일 영토였던 슐레지엔 지방의 중심도시 브레슬라우(브로츠와프)에서 태어났다. 마침 태어난 날이 이스라엘의 축일인 '속죄의 날(욤 키푸르)' 이었으므로 신앙 깊은 유대교인이었던 모친은 좋은 징조로 여겼다.
에디트 슈타인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전통적인 유대교 신앙을 훈련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사춘기와 학생 시절에 무신론적인 지성인들과 가까이 지냈고 인격적인 신이 존재한다고는 믿지 않았다. 다른 형제들보다 영특한 딸이 무신론자로 자람은 어머니에게는 가장 큰 걱정이었다.
독일 괴팅엔대학에서 심리학, 철학, 역사학, 독문학 등을 공부한 뒤 1916년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고 후설의 개인 조교[가 되었다. 그 후 현상학 분야에서 독자적으로 연구하며 교수자격논문(하빌리타치온)을 제출하여 교수가 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당시 독일 학계에서 여성이 교수로 재직함은 거의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대학 철학강사나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후 에디트 슈타인은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잠시 방문했던 친구 집에서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 자서전>을 읽고 깊이 감화되어 유대교 신앙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을 결심했다. 1922년 1월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았다. 유대인을 박해하는 독일인들과 화해할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라는 믿음으로,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3년 42세 나이로 쾰른의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해 하느님의 진리를 따르기 위해 스스로를 봉쇄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이듬해(1934)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에디트는 언니 로자 슈타인과 함께 네덜란드의 에히트 가르멜 수도원으로 도피했지만 1942년 8월 2일에 체포되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미 가톨릭으로 개종했기에 더 이상 박해대상이 아니었지만, 유대인 태생으로서 같은 유대인과 함께 하겠다는 결심으로 수용소에서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던 중 8월 9일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고 추정한다.
선종 이후 에디트 슈타인의 시복 시성 절차는 유례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7년 시복, 1998년 시성하였다. 시성 당시 교황은 "그녀의 순교는 유럽사의 극적인 상징이자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잇는 화해의 가교"라고 말한 바 있다. 2006년 10월 11일,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에디트 슈타인의 석상을 축복하고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의 벽감에 설치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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